불교문화

[스크랩] <불교저널> 2014. 05. 29. 황수영 박사-기록과 연구로 불교미술에 독보적 업적 남긴 거장(정영호 박사)

essenssie 2015. 11. 19. 10:16

 

 

 

(11) 황수영 박사
기록과 연구로 불교미술에 독보적 업적 남긴 거장

 

2014년 05월 29일 (목) 09:46:02 정영호 .

 

   

 ▲ 필자와 함께 한 황수영 박사의 생전모습(오른쪽). 황 박사는 한국 불교미술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나의 학창시절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다. 부산에서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에 입학했다.

전쟁 중이라 서울대학교 역시 부산으로 피난 온 것이다. 1953년에 2학년이 되고 그해 여름방학 때

서울이 수복되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2학년 때 지도교수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손보기 교수님이다. 서울대 대학원을 갓 나와서 정열적으로

‘국사학개론’ 등을 가르쳐주셨다.

당시 역사과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 학년이 봄가을로 답사를 다녔다. 경주가 가까우니 경주에 가서

1박2일 답사를 갔던 날이었다. 경주에서 동해로 나가다보면 어일을 지나간다. 거기에 감은사 절터가 있다.

동쪽에 3층 석탑, 서쪽에 3층 석탑의 커다란 쌍탑이 서 있다.

 

손보기 교수님이 감은사의 유래와 탑 이야기를 말씀해주셨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감탄하는 것을 보시고

“이 탑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탑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해주셨다.

 “높이는 얼마나 됩니까”하고 여쭸더니 “잰 사람이 없다”고 하셔서 “제가 재겠습니다”하고 당장 인근

류씨네 집에서 사다리를 빌려 2개를 얹고서 석탑의 높이를 재러 올라갔다.

그 모습을 누군가 사진을 찍었던지 나를 줘서 나중에 고희 논총에 그 사진이 수록될 수 있었다.

손보기 선생은 “정군은 탑에 관심이 많은가?”하고 물어서

 “고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 감은사 석탑을 보니 감탄해 마지않습니다”하고 답을 했다.

손보기 선생님은

“나는 전공이 아니지만 서울이 수복돼 올라가면 이 방면에 제일 권위 있는 학자로 황수영 선생이 있으니

찾아뵈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때 황수영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손보기 선생님은 황 선생님을 모시고 여러 강의를 부탁하고 만나 뵙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씀에 황수영 선생님이 대단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제시대에 유일한 한국인 박물관장이 계신다. 호는 우현(又玄), 함자는 고유섭 선생님이다.

황수영 선생님은 고유섭 선생님의 제자로 그 분의 모든 것을 물려받으신 유명한 미술사학자셨다.

서울이 수복되고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손보기 선생님은 황수영 선생님을 서울대로 모셔 초청 강연 자리를

만드시더니 직접 소개시켜주셨다.

 “전에 말씀드린 학생인데,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 감은사에서도 알려고 애쓰고 해서 잘 할 것”이라고

추천을 해주신 거다.

그때 황수영 선생님을 처음 만나 인사를 드렸다. 그 후로 60년. 내가 선생님을 모신 시간이다.

선생님은 무척 조용한 분이셨다. 동경 제국대학을 나오신 선생님은 제자들에게도 원론부터 차분하게 가르쳐주셨다.

 

선생님께서 어디 답사를 가실 때면 나에게 “학생 갈 수 있나?”하고 의견을 물으셨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선생님의 답사 제안을 거역한 적이 없다. 60년 동안 늘 모시고 따라다녔다.

 

선생님은 불상을 실측할 때면 반드시 2번을 실측했다.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도 선생님께 배운 대로 해왔는데 두 번째 실측이 다른 경우도 종종 있어 늘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만큼 우리 선생님은 정확한 분이셨다. 조사 작업을 하다 깨진 기왓장이라도 나오면 선생님은 신문지에 싸서

여관방으로 가져온 다음 일일이 기록을 했다. 머리로 알아두는 것과 기록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선생님은 누차 강조하셨다.

특히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등 한국사에 길이 남을 역사서는 그 현장을 일일이 찾아가 조사하셨던

철두철미한 분이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선생님은 답사를 가서 한방을 쓰게 되면 꼭 방 밖으로 나가셔서 담배를 피우셨다.

새벽에 눈을 뜨면 선생님이 안 계시니 송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만큼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를 배려하신 거다.

나중에야 사모님과 자제분들이 만류하셔서 몇 번의 시도 끝에 담배를 끊으셨다.

 

답사를 가서 보면 시골에서 옷이 없어 떠는 이들을 만나는 일이 많았다.

경주 감은사지에 갔을 때 선생님은 그 지역에 살던 류씨에게 옷을 벗어주고 오기도 했다. 한두 번이 아니다.

장터 같은데서 국수로 끼니를 채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옆자리의 사람들에게도 국수를 양껏 들게 하고

다 계산해주셨다. 그렇게 정이 많은 분이셨다.

 

어느 날인가는 선생님의 만년필을 보고 “좋아보인다”고 말씀드렸더니

당장 “자네 쓰게”하고 내주셨다. 나뿐만이 아니다. 선생님을 뵙는 모든 분들은 선생님 앞에서 뭐가 좋다는 말을 못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생님은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주셨다. 베풂이, 나눔이 몸에 배어있는 분이시다.

 

가까이 모시다 보니 선생님 댁에도 자주 찾아갔다. 선생님은 이런 저런 책도 권해주시고 선물해주시기도 했다.

논문을 준비할 때도 선생님께서 하나하나 지도해주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숙명여고에서 역사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때도 선생님에게 일일이 보고를 드렸고 선생님께서는 연구 자료를 보여주시면서 계속 공부를 이어갔다.

 

1957년경의 일이다. 당시 종로 4가에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살고 계셨다.

간송 선생님은 해외로 팔려나가는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자 사재를 털었던 분이다. 문화재로 애국애족하는

길을 몸소 보여주신 애국자이신 거다.

그 어른을 선생님께서 소개시켜주셨다. 정초에 간송 선생님께 세배를 드리러 가면

김상기, 이상백, 박종화, 황수영, 김원룡, 진홍섭, 최순우, 홍사준 선생 등이 계셨다.

그 어른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는 가운데 고고미술과 관련된 회화 도자기 불상 이야기를

들으며 공부를 참 많이 하게 됐다.

 

1957~1959년에 이왕 공부하는 것 모임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고고학 미술사 등을 공부하는 학자들끼리 서로 의사소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에 모두 동조를 했다.

‘고고미술동인회’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고고학과 미술사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가 1960년 8월15일이다.

<考古美術(고고미술)>이라는 잡지를 냈는데,

첫 제호는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과장으로 계시던 김원룡 선생님이 써주셨다.

 그 다음해인 1961년부터 추사체로 ‘考古美術(고고미술)’을 집자해 쓰기 시작했다. 그 집자 작업을 해주신

분이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다.

당시 동인회에는 간송 선생님을 비롯해 우리 선생님 등이 여러 선생님이 계셨는데 나를 동인회 간사로 임명했다.

 

<考古美術(고고미술)>을 100호까지 냈다. 그때까진 유인물이었다. 101호부터 인쇄물로 바꿔 작업을 했다.

 ‘고고미술동인회’는 지금의 ‘한국미술사학회’를 만들어낸 태동이다.

불교미술에는 건축미술, 조각미술, 회화미술, 공예미술 등이 있다. 우리 선생님은 건축미술은

특히 탑, 석탑 전탑 목탑 가운데서도 신라시대 석탑에 일가견이 있으셨다. 조각은 불상조각 연구가,

공예는 범종 향로 등 불교공예가 연구의 중심이었다. 회화 특히 불화, 불교미술 전반 연구 자료를 모으고

석탑 불상 범종까지도 섭렵하셔서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셨다.

나 역시도 선생님을 따라 석탑 불상 금속공예를 연구하게 됐다.

   
▲ 정영호 전 단국대 석좌교수.
1966년 9월부터 단국대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동국대 교수이자 박물관장이셨던 선생님께서는 ‘동국대로 왔으면’하고 바라셨다. “기회를 보자, 기다려보라” 하셨는데 그냥 단국대로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동국이나 단국이나 국은 마찬가지니 열심히 하라”며 웃으셨다.

 

단국대는 1967년 3월 정식 대학교가 되었다. 조교수 겸 박물관장 소임을 맡았다. 여전히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를 이어갔다. 단국대뿐 아니라 서울대 홍익대 한양대 숙명여대 등에도 출강을 했다. 단국대 박물관에서 20년간 일했다. 1986년부터는 한국교원대에서 강의를 했다. 선생님은 국립대에서도 강의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셔서 15년간 박물관장과 교수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정년퇴직을 할 때는 이미 65세였다. 좀 쉬고 싶었는데 국립순천대에서 석좌교수로 와달라고 해서

 2년간 봉사를 했다. 대전대에서도 석좌교수로 2년, 동국대에서도 석좌교수로 출강을 하고 나니,

단국대 이사장이 연락이 왔다.

원래 계시던 단국대에 오지 않고 왜 다른 학교에만 계시냐고 해서 2002년 3월1일 단국대 석좌교수이자

박물관장으로 위촉됐다.

그리고 올해 2월28일까지 만 12년간 단국대 석좌교수 겸 박물관장으로 활동하고 연구했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다.

 

우리 선생님은 3년 전인 2011년 94세를 일기로 작고하셨다. 2월1일, 추운 겨울이었다.

선생님은 중학생 때부터 운동을 한 유도 2단의 유단자다. 체격도 좋았다. 늘 건강하셨던 분이라

선생님께서 2~3년은 더 지탱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우리 곁을 떠나셔서 마음이 아프다.

 

선생님이 연구하신 저서로 황수영 전집을 냈다.

그 책 속에 선생님의 연구 내용이 집약되어 있고, 거기 실려 있지 않은 논설, 수필 같은 글들은 모아서 책을 낼

계획이다.

선생님이 작고하신지 3년에 접어들어서 올해는 선생님의 공덕추모비를 만들 생각이다.

공덕추모비 모금은 다 끝났다.

연내 건립을 목적으로 경주에서 건립지 후보로 두 곳을 검토 중이다. 왜 경주인가하면 선생님께서

중학생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곳이 바로 경주이기 때문이다.

문집이나 추모사도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원고들이 오고 있는데 빠르면 연내에 아니면

내년 즈음해서 문집을 낼 계획이다.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다.

 

선생님은 학문은 차분히 연구하고 발표해야한다고 늘 가르쳐주셨다.

선생님 말씀 중에 잊혀지지 않는 말씀이 바로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최선을 다하면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점검하면서 내용을 읽고 또 읽어보고 글자 한자도 잘못이 없게 고쳐 쓰라고 말씀하셨다.

 

남의 논문을 보고 비판하고자 할 때에도 그 분의 말씀과 논지가 뭔지 검토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하셨다.

검토해본 후에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함부로 반박하는 법은 없다는 점 또한 선생님은 늘 강조하셨다.

논문을 많이 발표하고 저서가 많다고 해서 그 학자의 논지는 아니라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다.

선생님은 논문을 발표할 때 그 내용에 다시 손 댈 필요가 없는 것이 진짜 논문이라고 하셨다.

저서 한권이면 그 방면을 다 터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대로 된 저서라는 것이다.

 

1962년부터 문화재위원회에 참여했던 선생님은

1959~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회담 당시 문화재 반환 협상의 실무대표로 활약했다. 그 일로 선생님의 혈압이 더 높아졌던 기억이 난다.

추모비를 준비하며 비문 내용을 정리했다. 처음엔 1천자에 달했던 내용을, 800자로 다시 600자로 줄였고,

최종적으로 정리한 건 400자였다. 길게 쓰는 것도 잡문인 것 같았다. 중요한 것만을 담아 만들었다.

추모비의 높이가 커도 선생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크기에 400자를 담아 석비를 세울 예정이다.

이미 추모비 건립을 위한 모금 작업도 마친 상태다. 추모비를 세울 장소는 선생님이 중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경주다. 두 군데로 후보지를 압축해서 지금 선정 작업 중이다.

 

지금까지 나는 선생님께 배웠던 학자의 본분을 잘 지키며 살려고 노력했다. 앞으로도 선생님을 기리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

 

-정영호 전 단국대 석좌교수·박물관장

 

 

출처 : 성낙주의 석굴암미학연구소
글쓴이 : 성낙주 원글보기
메모 : 박물관대학강의, 불교문화 관련 강좌에서 자주 뵙는 정영호 교수님의 행장을 접하고 기쁜 마음에서 스크랩합니다.